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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형제의 장편영화 ‘모래시계 표지판 아래 요양소(Sanatorium Under the Sign of the Hourglass)’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전주로 달려갔습니다. 퀘이형제가 보내 준 링크를 통해 영화 일부를 살짝 먼저 보기는 했지만, 모니터가 아닌 빅스크린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영화제 개막을 코앞에 두고 전주에 내려갔더니 많은 영화들이 표가 벌써 매진되었더군요. 퀘이형제 작품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저는 참여작가 찬스로 어찌어찌 겨우 구할 수 있었습니다. 첫 상영 당일 관람석을 꽉 채운 영화관의 모습은 놀라웠습니다. 퀘이형제의 영화는 내용이 난해해 관객의 호불호가 꽤나 강한 편으로 유명한데, 그럼에도 만석이라니 솔직히 예상 밖의 모습이었습니다. 몇 년 전, 퀘이형제의 일본 순회 전시 사인회에서 본 많은 인파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었죠.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 여러 생각에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진행 측의 아쉬운 실수가 한두 가지 있긴 했지만, 역시 전주에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 관계자 분들, 고맙습니다!)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에서 관람하니 작은 모니터에서 놓쳤던 부분들이 세세히 눈에 들어왔고, 강렬한 음악도 인상적인 비주얼과 함께 온몸과 마음에 전해졌습니다.

장장 19년간 지속된 프로젝트. 금속관절뼈대 제작으로 이 작품에 참여했던 제게도 참으로 오랜 시간이었습니다. 퀘이형제와 메일을 주고 받을 때마다 대략 그간의 진행 상황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 작품은 끝난 줄만 알고 있다 또 다른 뼈대 제작을 의뢰받는 등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이상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헐리우드의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퀘이형제 다큐멘터리 ‘Quay’의 한 장면. 세 사람이 ‘Sanatorium Under the Sign of the Hourglass’의 메인 금속관절뼈대를 관찰하고 있다. 2020년 6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퀘이 형제: 도미토리움으로의 초대展’에서도 같은 뼈대를 볼 수 있었다.

 

퀘이형제와 함께 작업한 기간은 제 커리어에 있어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20년 넘게 그들이 사용하는 금속관절뼈대를 만들어 왔으니까요. 멕시코 영화학교에서 제가 만든 뼈대를 우연히 발견한 퀘이형제에게 연락을 받은 것도 기막힌 우연이지만, 우리 세 사람 모두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스톱모션 업계에서 살아남아 꾸준히 작업해 왔다는 것도 정말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퀘이형제의 작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상업 프로젝트에 익숙한 저에게 항상 도전적인 과제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들만의 독립적이고 독특한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은 속도와 효율을 선호하는 상업 프로젝트와는 여러 면에서 대치됩니다. 그래서 대형 상업 스튜디오의 프로젝트가 주된 일거리인 제가 퀘이형제와 함께 작업을 하려면 비교적 많은 시간을 고민해야 하죠. 그러나 작품에 참여하는 스텝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존중하는 퀘이형제의 스타일 덕분에 매번 작업에서 과감한 디자인의 뼈대가 탄생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제껏 미스테리하게 여겨왔던 퀘이형제의 세 번째 장편이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을 통해 20년 만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영국, 독일, 폴란드의 합작 프로젝트인 이 작품에서 저는 공식 크레딧에 유일한 아시아인 스텝으로 이름을 올렸고, 제가 제작한 금속관절뼈대가 영화 안에서 원형 그대로 노출되어 등장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래시계 표지판 아래 요양소’라는 이 영화는 제가 20년간 퀘이형제의 금속관절뼈대 제작자로 일하며 기울인 노력에 대한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퀘이형제의 신작 장편영화의 엔딩크레딧에 김우찬 감독의 이름이 있다.

모래시계 표지판 아래 요양소(Sanatorium Under the Sign of the Hourglass)의 엔딩 크레딧 중 일부.

 

 

지난 주에 퀘이 형제의 전시 준비가 한창인 전주 팔복예술공장에 다녀왔습니다. 급변하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전시 오픈이 15일에서 20일로 연기되기는 했지만, 전주국제영화제 관계자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수고하고 계시더군요.

퀘이 형제는 뉴욕현대미술관(MoMA )을 비롯한 여러 세계적인 갤러리에서 전시를 할 만큼 그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애니메이터 겸 영상 작가라 국내에서 형제의 전시를 볼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전주국제영화제 측의 노력으로 올해 퀘이 형제의 한국 전시가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퀘이 형제의 작품 속 초현실적인 장면을 담은 커다란 전시 현수막이 도시 재생으로 새롭게 태어난 폐공장 건물과 어우러진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더군요.

 

 

퀘이 형제가 2004년 멕시코에서 우연히 제 금속관절뼈대를 발견하고 연락을 해와 서로 인연을 맺게 된 지 벌써 15년이 넘었네요. 그 당시에도 두 분은 스톱모션 작업자들이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게 되는 거장이었습니다. 또한 작품의 몽환적인 분위기만큼이나 그들 자신도 업계에서는 베일에 싸인 존재였죠.

2005년 봄은 런던에서 팀 버튼 감독의 <유령신부>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고, 퀘이 형제와의 첫 협업인 <Sanatorium> 프로젝트가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이 두 작품 모두에 관절뼈대 제작 스텝으로 참여하고 있던 저는 몇 가지 일을 정리하고자 런던에 다녀왔죠.

<유령신부>를 제작하던 스튜디오를 방문해 그곳 친구들에게 퀘이 형제의 스튜디오가 런던에 있다고 말하자 제작팀이 술렁이기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퀘이 형제는 동유럽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다들 추측하고 있을 정도로 미스테리한 존재였으니까요. 며칠 뒤 <유령신부>의 감독과 선임 애니메이터가 퀘이 형제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겠냐고 조심스럽게 묻더군요. 이후에 퀘이 형제를 자신들의 스튜디오에 초대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5월 20일 오픈 예정인 <퀘이 형제: 도미토리움으로의 초대 >의 전시장 입구

이처럼 퀘이 형제는 스톱모션 작업자들도 꼭 한 번은 만나보고 싶은 애니메이터이자 아티스트입니다. 왜 이렇게 프로들까지 퀘이 형제에게 열광하는 것일까요? 형제의 작품을 논하는 수많은 논문과 평론이 쏟아지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학자도, 평론가도 아니기에 그러한 글들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더군요.

그래도 스톱모션 업계의 현장에서 일하는 작업자 입장에서 한 마디 하자면, 퀘이 형제의 범접할 수 없는 독보적 작품 세계는 단순히 테크닉이 뛰어나다고 해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시선을 뗄 수 없도록 만드는 초현실적 미장센. 이건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거죠. 퀘이 형제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하나의 영상 예술로까지 승화시킨 대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경지에 도달한 대가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퀘이 형제의 스튜디오를 영상 스케치로 담아 <퀘이>라는 다큐멘터리로 만든 게 아닐까요. 그리고 수많은 작업자들처럼 퀘이 형제의 스튜디오에 방문해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구요…😂